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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부터 주 양육자입니다. (연재)

(1화) 아빠와 아들 단둘이 제주도 여행

by 라파고1 2023.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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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아들 단둘이 제주도 여행

 

뭐? 둘이?

 

이달(2월) 말이면 1년 치 휴가가 리셋되는 날인데, 아직도 남아있는 휴가가 13일이다. 여기에는 회사가 법적으로 돈으로 주는 수당 지급 의무 없이 소멸하는 휴가가 6일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껏 회사 생활하면서 이런 적이 있었나?

작년 한 해는 코로나로 인하여 어딜 갈 수가 없었고 맘 편히 누굴 만날 수도 없었다. 종종 휴가를 즐기는 우리 가족 또한 외부 활동을 자제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는 고역을 꾸역꾸역 계속해서 견뎌야 했다. 지방에 계신 어머니께서 서울 병원 오시는 날이나, 장모님 사정으로 아이 하원 시킬 사람이 없는 아주 특별한 날들을 제외하고는 휴가를 낼 일이 없었다. 정말 6일을 연속으로 쉰다면 주말과 3.1절을 포함해서 11일을 쉴 수 있게 되는데,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신혼여행을 제외하고 이렇게 긴 휴가를 내본 적이 없다. 때마침 거래처와의 중요한 계약이 마무리되었고, 기다리던 신입사원이 부서 배치되어 일손을 좀 덜게 되었으며, 코로나로 인해 외부 미팅이 없어져서 휴가를 낼 수는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뭘 하지?
11일 동안?



와이프는 같은 기간 휴가를 낼 여유는 없었지만, 주말을 포함하면 4박 5일 정도는 휴가를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그래 좋아.

어디라도 가면 되겠군.

그럼 나머지 6일은 뭐하지?

와이프 출근하고, 6살 아들이 어린이집에 가면 넷플릭스를 켜고 맥주를 마시면 되겠다.

 

오랜만에 그런 휴가다운 휴가를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데 굳이 하지 말았어야 하는 생각을 했다.



제주도나 갈까.

6년 전 올레길 한복판에서 로망이 떠올랐다.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 시절, 6년 전.


차 안은 반소매만 입어도 될 만큼 햇볕이 따뜻했고, 차 밖은 살랑살랑 시원한 바람이 부는 봄이었다. 한쪽에는 구멍 송송한 현무암 담장 안에 유채꽃들이 하늘거리고, 다른 한쪽에는 텔레비전의 지중해에서 본 것 같은 아쿠아마린 색의 바다가 끝도 없이 펼쳐진 올레길 위에서 우리는 걸었다. 걷다가 바위에 붙어있는 게고둥인가 고둥인가 했고, 널브러진 미역을 좀 주워다가 미역국을 끓여 먹을까 하면서 깔깔거렸다. 그때 나는 아들과 말이 통할 때쯤 아들과 올레길을 걷고 싶다고 말했다. 와이프는 딸이 태어나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하냐고 타박했지만 이듬해 아들이 태어났고, 그 아들은 지금 6살이 되었다.


내가 하랑이랑 제주도 먼저 가 있고, 당신은 일 마무리되면 혼자 오는 건 어때?



처음에는 정말 그럴 생각으로 말한 건 아니었다. 그냥 내뱉어 본 것뿐이다. 너무 현실적이지 않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는 극한의 다큐멘터리나 예능의 소재로 쓰일 만큼 보편적이지 않은 이야기이며, 적어도 내 주변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엄마들이 제주도에 한 달 살기 가더라는 정도는 들어본 적 있다. 나는 일반 회사원이고 육아휴직을 내고 전업으로 아이를 케어하는 사람도 아니며, 된장찌개 하나쯤 뚝딱하면 끓여낼 만한 솜씨가 있지도 않았다. 진짜 그냥 한 번 내뱉어 본 것뿐이다. 단지 와이프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런데 그 말을 하고 난 후 미래의 그 날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아무도 없는 곳에 아이를 데리고 가서 나 혼자 모든 걸 케어할 수 있을까? 나의 꿀 같은 휴가를 반납하고, 스스로 극기 훈련을 하러 가는가? 농담이었다고 말하면 해프닝으로 끝날 일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유는 그냥 단 한 가지였다.


그냥 가보고 싶다.
가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 앞에서 다른 이유는 너무나도 사소한 것들이 되어버렸다. 





와이프는 실없는 농담을 들은 듯 웃으며 말했다.
가고 싶으면 가~
어떻게 수습할지 나의 반응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진짜 갈게

뭐?

진짜 간다고! 하랑이랑 둘이 먼저

얼마나 먼저? 하루? 이틀?

아니, 4일!

농담하는 거 아니지?

어. 농담 아니고 진짜.

 

 

 

 

나는 혼자 여행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해외 배낭여행은 물론이거니와, 기차여행도 혼자서는 가본 적 없다. 그런데 혼자도 아니고 6살 아이를 데리고 제주도를 간다니... 항공권 결제 문자가 올 때도 별생각이 없었으나, 뒤이은 예약 안내 문자에서 ' OO시 까지 공항 도착, 비행기 체크인을 어떻게, 보딩 타임은 출발 00분 전부터 읽어보는 순간에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진짜 가는구나. 가족 여행에서 원래 내가 많은 부분을 준비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계획 짜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계속해서 불안했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예상치 못한 상황을 예상한다는 것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돌아오는 날까지의 이동 경로경로별로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들, 돌발 상황 해결을 위한 준비물들. 돌발상황이란 예상치 못한 상황을 의미하는데, 예상치 못하는 상황을 예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돌발 상황을 예상한다기보다 예방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고 하는 게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물론 여행에서 예쁜 옷도 중요하고, 좋은 숙소 그리고 맛집도 중요하지만 단둘이 떠나는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바로 돌발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준비였다.


여행의 모든 계획은 제1원칙을 위주로 짜여졌다. 그 원칙은 바로 "아이 손을 꼭 잡을 한 손은 비우기, 그리고 실종 유괴 예방 교육하기" 였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한 손으로는 아이 손을 잡고 있을 수 있도록 가방의 종류를 선택한 후에 짐의 양을 결정했다. 캐리어 1개, 백팩 1개, 슬링 백 1개. 슬링 백에는 지갑, 휴대폰, 아이 등본, 손 세정제를 넣었고 백팩에는 보조배터리, 셀카봉, 휴대용 소변 통을 넣었다. 그 외의 짐들은 모두 캐리어에 넣었다. 백팩과 슬링백을 둘러 메면 한 손으로 캐리어 하나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로 하랑이의 손을 꼭 붙잡을 수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아이에게 교육을 했다.



아빠 손 안 잡고 갑자기 혼자 막 달려가면 안 되는 거 알지?
아빠는 항상 하랑이 주변에 있으니까, 아빠가 안 보인다고 찾으러 다니면 안 돼. 아빠가 올 거야!
하랑이 목걸이에 아빠 전화번호 있는거 알지? 아빠가 없으면 주위 어른들한테 전화해달라고 해야 해.
모르는 사람이 아빠 있는 곳 안다고 같이 가자고 해도 가면 안 되는 거 알지?
과자나 사탕 준다고 같이 가자고 해도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돼!



굳이 엄마 없이 제주도 여행을 간다고 설레발을 쳐서, 평화로운 아이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가도 언젠가는 해야 할 교육이었다. 오늘이 아니면 내년에라도, 여행이 아니라도 아이에게는 꼭 필요한 교육이었고, 사랑에는 고맙게도 담담하게 끄덕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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